
한민일보 서울포커스 임광현 기자 |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겨울 저녁은, 자칫 ‘한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질 뻔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6시 57분, 한 다가구주택 3층 계단에서 원인 미상의 불이 났다. 계단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이자 내려오는 통로다. 연기가 그 길을 먼저 점령하면, 집 안의 사람들은 방향을 잃는다.
그때 인근에 살던 정택은(61) 씨가 뛰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던 소화기를 들고 곧바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불길이 커지기 전에, 계단에 붙은 불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하며 초기 진화에 나섰다. 동시에 “밖으로 나오세요”라는 목소리로 주민들을 깨웠고, 4명을 대피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뒤이어 출동한 소방대가 현장에 도착해 진화를 마무리했다.
동대문소방서는 “자칫 큰불로 번질 수 있었지만 초기 대응이 빨라 조기 진화가 가능했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불길은 잡혔지만, ‘잡는 사람’의 몸은 그 대가를 치렀다. 정 씨는 진화 과정에서 유독가스를 과다 흡입해 왕십리 소재 화상전문병원으로 이송됐다. 산소호흡기 치료를 받은 뒤 1월 4일 퇴원했지만, 현재도 통원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정 씨는 사단법인 대한인명구조단(일명 911구조단) 동대문지부 단장이다. 이웃들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위급할 때 나타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행 911’ 활동을 하고, 요양원 휠체어를 고치고, 창신동 달동네의 오래된 화장실을 손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낡은 나사가, 또 누군가에겐 고장 난 바퀴가 하루의 전부를 흔드는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날 계단에서 그가 붙잡은 것도, 결국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였다.
동대문구는 정 씨의 용기 있는 대응을 ‘숨은 영웅’의 행동으로 평가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구청장 표창을 추진한다. 아울러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지정 신청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며, 서울시 안전상 추천도 검토 중이다. 의상자로 지정될 경우 등급에 따라 특별위로금 등 지원이 이뤄진다.
이필형 구청장은 “정택은 단장의 신속하고 용감한 대응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며 “이웃을 위해 몸을 내민 시민의 헌신이야말로 지역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가장 든든한 힘”이라고 말했다.
불은 꺼졌다. 그러나 누군가의 용기가 남긴 온기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장안동의 그 계단에서, 사람들은 ‘안전’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배웠다. 한 사람이 들고 뛰어간 소화기 한 대가, 네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지켜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