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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관점으로서의‘ 뮤크라커’를 말하다

"용공주의적, 친공주의적, 친북주의적 진보 지식인들의
보수정치권 작살을 전제한 폭로주의가중단되지 않는 한
진정한 ‘뮤크라커’는 존재하기 어렵다"


오늘 제가 이 토론에서 언칭하려는 ‘문화적 관점으로서의 뮤크라커’는 사실상 문학과 예술이라는 오늘의 대 주제와는 조합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뮤크라커’ 라는 어의 또한 문학과 예술이라고 하는 장르에는 다가 갈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꿰어 맞춰서 강제로 조합을 시켜 본다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적어도 위선과 허위, 가증과 조롱, 말의 유희, 폭거 등에서는 문학과 예술, 그리고 ‘뮤크라커’와 일맥 되어지는 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들이 규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
의 편견일 수도 있다고 치부하겠습니다.

이 말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선 문학의 정의에 대해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제가 주제로 삼은 “문화적 관점에서의 뮤크라커”를 개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문학을 말할 때 “문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로는, 삶의 가치 있는 경험을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언어로 짜임새 있게 표현한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갈래를 크게 서정(抒情)·서사(敍事)·극(劇)으로 나누기도 하고 거기에 교술(敎述)을 부연하기도 합니다. 통속의 범위로 더 확대하면 시·소설·희곡·수필 등도 각 각의 문학적 개념 속의 포함될 수도 있지만, 이를 굳이 분류한다면 상업성을 띠고 있고, 대중을 겨냥하여 그들의 통속적인 흥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문학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중문학의 하위 장르에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위 장르로 전락될 수 밖에 없는 대중문학과 같이 ‘뮤크라커’ 들의 현재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대체 ‘뮤크라커’가 뭔데, ‘문학적 범주와 비교하여 말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질 분이 계실 겁니다.

‘뮤크라커’는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제가 ‘언론인’인 까닭에 미디어적 영역에서 말을 한다면, ‘폭로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폭로’라는 말은 일단 부정적으로 비치게 됩니다. 선정적이고 무책임한 ‘폭로 저널리즘’은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부작용을 낳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폭로는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활용됐을 경우 사회 정화작용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입니다.‘사회감시’라는 언론 기능 역시 폭로라는 원초적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 개혁과는 전혀 상관없는 폭로가 난무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유명인 사생활 캐기, 유명인사 추문 들추기 등을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기자들도 등장하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게 되죠. 사람들은 이런 기자를 추문 고발자,이른바‘Muckraker’로 비하했습니다. {Muck}는 ‘오물’, {Rake} 는‘샅샅이 뒤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 오물까지도 샅샅이 뒤지는 ‘락커’ 들이 생산해 내는 보도는 가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거짓말을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나치 선동가 괴벨스의 유명한 말입니다. 실제로 나치가 유대인을 “페스트”라고 거듭 공격하자 사람들은 유대인을 병균처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이 시기와 비슷한 때 스탈린과 무솔리니도 온갖 거짓을 사실로 포장해 정적(政敵)을 학살하고 스스로 우상화했습니다. 일본은 국왕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믿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한민국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용공, 친북주의적 지배권력들의 무작위적 폭로에 의해 보수정치권 궤멸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같은 용공주의적 사회주의의 할거는, 사실상 좌파인사들의 폭로주의에 기인한 바 크고, 상대적으로 폭로기자들의 역할을 지배권력의 나팔수들이 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컨대 폭로기자들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왜소해 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 좌파 지배권력들의 폭로는 ‘내로남불’적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에 있는 것에 더하여 자신들의 주군들에게는 폭로주의를 거두어 내고, 폭로 대신 용비어천가를 짖어 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를 적용하는 것이 아마도 북한에서 수입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북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은이 ‘모래알로 쌀을 만드시고, 가랑잎 한 장을 띄워 대하를 건너 가신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축지법’의 달인, 김정일은 ‘시간을 주름잡는 축시법’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 앞에서 북한은 ‘지상 낙원’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그렇다 치고, 이 대한민국 내의 다수가 이 뻔한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지적(知的) 블랙홀’에 빠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 정치권에는 ‘탈사실의 정치(post-factual politics)’란 말이 있습니다. 이미 20여년 전에 나온 말인데, 합리적 정책과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감정과 신조가 여론을 형성하고 진실로 간주되는 시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이 부(富)의 총량을 늘린다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증명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유무역이 ‘근로자에 대한 살육’이란 선동을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가짜 락커들이 판치는 ‘가짜 뉴스’도 요즘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상 팩트를 전제로 한 락커들이 사양되고,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지배권력들의 락커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요즘 미국 언론은 트럼프 정권에 맞서 그들의 억지 주장을 하나하나 검증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언론들은 끽소리도 못하고 벙어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지배권력들에게 찍히는 순간, 그 부패와 부정의를 보도한 신문사는 곧바로 문을 닫아야 만 하고, 그 글을 쓴 기자는 지배권력 락커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실정에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인들은 정·재계의 부패를 열심히 폭로하는 언론을 ‘머크레이커스(muckrakers)’라고 불렀습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거름 갈퀴를 든 사나이’에서 유래한 것이죠. 미국이라는 나라가 남다른 것은 이런 언론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가 83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번의 필화사건으로 곤욕을 치룬 바 있었습니다.

하나의 예로 전두환에 대하여, “전통에게 경고하다” 라는 제목을 붙혀서 컬럼을 기고했습니다. 이 때 어떤 것들이 저를 옥죄고 들어 왔겠습니까 ? 지금은 사문화가 되었지만, 소위 국가원수 모독죄로 응징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에 반민주 독재정권이어서 생겨 난 현상일까요? 그렇다면 작금의 이 시대는 무슨 시대입니까? 민주화의 시대입니까 ? 얼마 전 저는 저희 신문사 경영진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았습니다.

“조본부장님이 집필하고 있는 ‘여의도단상’에 정치이념이 회자되거나, 지배권력을 비판하는 글을 자제해 달라고 말이죠.” 일단 살아 남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주문인 셈입니다. 이게 직업으로서의 ‘뮤크락커’들이 사양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고, 민주화 시대하고는 자화자찬 하지만, 과거 반민주 독재시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바로 이 정부가 태동되기 전의 ‘뮤크락커’ 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특히 사회개혁을 목표로 정부나 대기업의 부정 부패 등을 고발하던 폭로 기자들(Muckrakers) 의 활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Muck(쓰레기, 오물) 와 raker (갈퀴, 샅샅이 헤치다)의 합성어인 ‘Muckraker’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폭로기자들에게 다소 경멸적인 뉘앙스를 섞어 붙인 명칭이기도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의 폭로 기자들은 탐사보도 전문가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폭로 기자로는 아이다 타벨과 (Ida M. Tarbell), 업튼 싱글레어 (Upton Sinclair)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아이다 타벨은 여성 저널리스트로서 그녀의 성취와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가령 그 여자는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대화를 통해 안 내용이라도 절대 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백미는 그녀가 맥클루어 매거진 (McClure's Magazine)지면을 통해 1902년에서 1904년 까지 연재했던 스탠드 오일 컴퍼니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Standard Oil
Company: the Oil War of 1872)에서 적나라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 연재물에서 그녀는 록펠러가 최대 주주였던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가 비열한 기업 합병의 방식을 동원하여 19세기 말 미국 전체 정유 산업의 대부분을 독점해온 과정을 고발한 것을 계기로. 1911년 미연방 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다 타벨의 연재물이 끼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뮤크락커’가 국가에게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역할이 기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과거 노태우정권이 끝나고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직후, 노태우 비자금을 누가 폭로했습니까? 정권의 충견 역할에 충실했던 모 의원이 폭로했습니다.박근혜의 실상을 누가 폭로했습니까 ?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이 저널리스트로서의 뮤크락커들의 게으름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할 것이지만, 앞서의 두 가지 사례는 정치적 차원에서 악용하여 정적을 죽이려는 음모에 의해서 저질러 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통탄스럽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보면 당시의 폭로 기자들은 “세상을 좀더 살만 한 곳으로 바꾸는” 데에 톡톡한 기여를 했던 사례도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PD수첩이 그런 의미를 가지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예컨대, 피디수첩 황우석편은 연구윤리에 대한 사회 전반의 토론과 성찰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방송되기로 했었던 PD수첩 “4대강 수심 6m의 비밀”편은 불방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법원이 국토해양부의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기각했음에도, MBC 이사진이 방송 2시간을 앞두고 내린 결정입니다. 이런 사태는 정권의 압력으로 불방된 우르과이라운드편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이제 이 토론의 본질, 즉 문화적 관점에서의 ‘뮤크라커’를 토로하면서 저에게 맡겨진 주제톨혼을 마감하겠습니다.

그동안 문화적 시각에서 뮤크락커 역항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해 왔으며, 특히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했습니다. 1950∼1960년대의 ‘사상계’가 그러했으며 필화로 폐간된 ‘다리’,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등이 그런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물들로는 김지하 시인의‘오적’,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등이 하나의 예가 될
것입니다. 동아일보의 월간 신동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신동아가 복간 이후 겪어야 했던 탄압과 필화사건이 그러한 사정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은 한국언론의 위상에 어떤 변화가 초래됐는지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도 위험합니다.

반면 국가 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너무도 왜곡돼 있습니다. 또 하나, ‘뮤크락커’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SNS’도 에드워드 버네이스(PR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전 전문가. 편집자)가 말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부’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하나의 권력 그 자체입니다.

정보 시대는 사실상 미디어의 시대입니다. 미디어에 의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미디어에 의한 검열, 미디어에 의한 악마화, 미디어에 의한 보복, 미디어에 의한 진실 회피 등이 자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권력에 순종하는 상투적 언사와 거짓된 프레임의 초현실적인 결합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을 달리 말하면, 저널리스트로서의 ‘뮤크락커’들의 부재가 낳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우울합니다.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잘 못하면 기자는 폭력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언론장악 능력은 확실히 진일보했습니다. 기자실에 대못을 치던 노무현 정권의 우악스럽고 거친 방식 대신 노련하고 섬세한기술과 영악한 꼼수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노무현이 정공법으로 언론과 정면에서 붙었다면 문 대통령은 측면에서 기습하고 우회적으로 약은 꾀를 쓰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언론장악이 과거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울 정도로 효과적인 것은 언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바뀐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좌파가 대세로 굳어지면서 이들과 정반대 쪽 사람들도 한 가지 사실만은 반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진보·좌파들이 보수·우파를 악으로 만 규정하고 당하는 ‘억울한 피해자’ 시늉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점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반민주 체제에 저항하는 의로운 약자가 아닙니다. 군부새력에게 얻어터지는 ‘민주화 양심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한때 약자로서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다고 자만했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현재의 지배권력들은 이제 한 나라의 공안·정보·사찰·숙청·형벌·문화·교육·미디어·기업의 생살여탈(生殺與奪)권을 거머쥔 저승사자가 됐고, 보수세력은 피고인입니다. 그렇다고 보수세력이 약자의 도덕적 우위를 탈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보·좌파가 ‘약자의특권’을 잃음으로써 양쪽이 대등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대등은 그러나 고상함 아닌 너절함의 형성평이라는 점에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어쩌고 하더니, 진보 시대에도 승자독식(勝者獨食), 20년 장기 집권 운운, 권력형 성폭행, 내로남불, 피감 기관 돈으로 해외 유람, 댓글 공작, 검은돈 수수, 정적(政敵) 숙청은 전 정권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통해 시대적 뮤크락커 역할을 자행한 공지영 작가는,‘해리’라는 소설에서 진보·좌파에도 정의·정직·도덕·헌신만 있는 게 아니라 거짓·가짜·사기·위선도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그는‘작가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쌓은 언어들, 이념들, 평가들은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일 없는 순박한 여자들이 더 삶에 가까웠다. 진보·좌파도 이 점에선 예외가 아니더라는 게 그가 전하고
싶은 말인 듯 싶습니다.

이에 대해 ‘그런 줄 몰랐나? 왜 이제서야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는 댓글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뮤크락커 공지영은 불매운동 추진자들의 중심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 중심에는 지배권력들의 홍위병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여전히 문학작품을 비롯한 문화에 대한 천박한 이해도 우리사회가 아직도 갈길이 한참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이 현실의 고통과 고뇌와 비굴함을 외면한채. 고상한 미사여구 만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자화자찬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주검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며 모금한 돈을, 또는 세월호 유가족과 밀양 송전탑에서 싸우는 할머니들과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준다고 모은 그 돈을 어떤 특정인이 자신의 정분이 난 여자와 둘이 쓰고 있다는걸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사람들은 그걸 알아볼 수 있을까요?

뮤크락커들을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밝혀야 만 밝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지배권력의 말이라면, 이걸 마치 완전한‘하느님 말씀’인 양 절대화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나팔수들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근본주의, 교조(敎條)주의, 탈레반주의입니다. 비정한 사회, 잔혹한 정권에 대한 비판은 문학에서 되새김질 되고 폭로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지금 아우성 치고 있는 국민들의 경기 침체를 자기들의 지나친 ‘사회주의적 국가 개입’탓이 아니라 과거 보수정권들의 신(新)자유주의 탓이라고 우기는 걸 보면 ‘지배권력 내부에서 근본주의자들이 고삐를 쥐었구나’하는 불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꼴통적 보수세력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성찰적 진보’의 비판이 더 아리고 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리버럴한 진보 지배권력들이 ‘말할 자유’를 외치면서도 한편에선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을 마구 처
형하는 북한에겐 왜 눈을 감는지 모를 일입니다 ?”

“현재의 지배권력인 리버럴·좌파들이 연쇄 살인범 사형에는 반대하면서 낙태 살인은 선택의 문제라고 한다”는 비판은 어떤 맥락으로 봐야 할지....

“진정한 뮤크락커들이 앞으로 싸워야 할 악(惡)은 진보의탈을 쓴 위선자들”이라고 한 진보 내부의 화두가 더 뜨겁게 달군 여름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뮤크락커는 벌거벗은 대통령을 보고 소리 지르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정답이 될 것입니다. 뮤크락커는 대통령이든 누구든 벌거벗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다고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시각에서의 뮤크락커의 진실은, 구 소비에트연방의 솔제니친이 녹여 낸 수용소문학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이 토론의 주제를 마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대형 대기자  hanmin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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