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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 조대형 대기자 … 헌법 개정의 미필적 고의, 입법제도 왜 유기하나
조대형 대기자

민주주의의 한 유형인 간접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치 형태이다.
대의제, 대의 민주제라고도 한다. 근대 이후 대다수의 국가는 국민의 대표 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기초하여 국가 권력이 행사되는 대의 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간접 민주주의는 대규모 집단에서 민주 정치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형태이며, 전문적인 입법과 행정이 가능하다. 또 책임 정치를 실현하며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순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 및 제도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첫째, 국민의 대표 기관으로서 국회의 성격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정책 및 입법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전문 관료 집단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이익 집단이나 시민 단체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정책 결정의 주체가 다원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정당 지도자 간의 타협으로 정책이 결정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의회의 대표성을 약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둘째, 정치적 무관심의 증가이다. 2016년 국회 의원 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율 58%는 우리 국민의 두 명 중 한 명이 주권자로서의 기본적 권리인 선거권조차 행사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는 1950년대의 90%가 넘은 투표율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50% 내외의 낮은 투표율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등 민주 정치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적 무관심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 지역에 근거한 정치경쟁 구도, 정치에 대한 낮은 효능감, 사생활 중심의 의식 구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대의 민주제 자체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 때문에 국민 스스로 국가 정책은 국민의 몫이 아니라는 소극적 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정치체제를 대의민주주의라 하기 남세스럽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민 뜻을 대변해 국민 주권이 실현돼야 대의민주주의인 거다. 우리는 그냥 대의제일 뿐이다. 국민대표가 권력자 뜻만 받들어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을 유린하게 고무·방조한 거 아니었던가. 참다못한 국민이 촛불을 켜 들자 ‘앗 뜨거워라’ 대통령을 쫓아내고 다시 대선을 치렀지만 정작 자신들 임기는 3년이나 남았으니 아쉬울 게 없는 이 땅의 국민대표들 아니냔 말이다.

“잘못 뽑았다”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고 3년을 기다려 다른 사람을 뽑아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
정당의 실세가 공천권을 틀어쥐고 국민의 선택권은 이를 추인 하느냐 마느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회의원이 누구에게 충성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친박연대’라는 노골적 이름의 정당이 생겨나고 실세를 거슬러 국민의 뜻을 좇다가 ‘배신자’로 몰려 공천 탈락하는 예를 본 게 먼 과거가 아니다.

그러고도 당 혁신위가 혁신의 일환이라며 버젓이 ‘전략공천’을 내세우는 게 이 나라 정당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선 입법절차조차 이권 또는 요식 행위가 된다. 당 지도부 몇몇에 의해 주요 정책과 법률안이 정해진다. 의원들은 국민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우선하는 법안만 발의한다. 여론 수렴이 끝났고 정부가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종교인 과세를 유예하자는 법률안이 버젓이 나오는 이유다. 이제 대통령의 말에 일리가 있고 루소의 말은 더더욱 진리임이 명확해졌다. 대안은 직접민주주의다. 몇 가지 오해만 걷으면 된다. 흔히 직접민주주의는 세 가지 이유로 부인된다. 대의제도가 무력화된다는 것과 고대 그리스처럼 도시국가 수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 모델인 스위스 역시 법률안의 90%를 국회가 발의한다. 국회가 국민 의사에 반하는 법률을 만들 때 국민투표로 거부할 수 있고 국민이 요구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을 때 국민이 직접 발안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이런 장치가 국회에 더욱 책임감을 부여할 것이다. 국회와 국민
이 선의의 경쟁자가 돼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도시국가 운운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오늘날 유권자가 한자리에 모일 필요는 없다. 한 세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정보기술(IT)이 온라인 광장과 온라인 투표를 자유롭게 한다. 국민과 경쟁하는 의원이나 정당이라면 최대한의 현안 정보를 제공하며 국민을 설득하려 나설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정치 개혁이다. 중우정치보다 더 무서운 건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 엘리트들의 오만정치(傲慢政治)임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권을 규정한 헌법 128조 같은 전형적 플레비시트(plebiscite)를 없애야 한다. 유신헌법에서 ‘국민’을 ‘대통령’으로 바꾼 게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악법 사례다. 원래의 주인인 국민에게 권한을 돌려줘야 한다. 루소가 직접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국민주권’은 참여에 의한 자유 확보로 실현된다.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해 직접민주주의가 미래란 말이다. 이번 헌법 개정의 한 축에 입법부 문제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미필적 고의성이 강하다.
직접 민주주의든, 간접 민주주의든, 그것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차제에 입법부 구조와 관련한 사항을 헌법개정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조대형 기자  hanmin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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